25일 평화의 시선 월례미사와 특강은 우리곁의 난민이라는 주제로 난민 다섯 분을 초대하여 진행하였습니다. 난민 당사자가 이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난민과 함께하는 사람책 도서관프로그램은 난민 활동을 하는 비영리 단체 아시아 평화를 향한 이주(이하 MAP)’의 진행과 통역을 협조 받았습니다..

이날 평화의 시선 참여자들은 다섯명의 난민 중 1명의 이야기를 듣고 궁금한 것을 질문하며 난민에 대한 이해를 높이게 되었고 전체 마무리 시간에는 각자가 만난 난민을 소개하며 자신으 소감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참가자들은 초대된 난민들 모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어 아쉬웠했지만 모둠별로 진행된 만남을 공유하며 난민들의 이야기를 새롭게 느끼고 경청하였습니다. 난민책 도서관이 좀더 많은 곳에서 열리기를 바라며 참여하신 분들의 이야기와 소감을 소개합니다.

 

사람책 도서관을 읽고,,,,

난민에 대해 막연한 이미지만 있었는데 사람책을 통해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직업소개소에서 일하려면 히잡을 벗어야 해” “한국의 룰이야, 한국에서 살려면 히잡을 벗어야 해” “히잡 쓴 사람을 원하지 않아라는 말을 듣고 그 담당자에게 히잡을 벗을 수 없다.’ ‘이게 내 모습이다.’ ‘한국은 그렇지 않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멋진 야스민에게 박수와 응원을 보낸다. 부끄러움은 나의 몫~ 난민과 여성의 삶이 다르지 않다는 것과 난민을 집단으로 보면서 일반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으로 바라볼 수 있는 좋은 시간이었다. 편견이나 다른 시선이 난민들에게 불안과 두려움이 아닌 평화와 존중되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 ‘예멘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는 야스민의 마지막 말이 정말 뭉클하고 마음에 남는다. -황소연-

 

난민에 대해 토론을 해본 적은 있어도 그들의 현재 상황이나 사연이 궁금하거나 와닿은 적은 없었는데, 이번 기회로 그 부족하던 부분들을 채울 수 있었던 것 같아 좋은 경험이었다. 대부분의 우리 또래 친구들이 얕은 지식으로 난민을 무조건적으로 반대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이번 만남으로 내 생각을 더 굳힐 수 있게 된 것 같다. 사람들은 과장되거나 왜곡된 정보로 난민을 혐오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 그들의 생활을 볼 생각도 안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야 사실을 알릴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사실 처음엔 그냥 아 가자고 하니까 간다하는 생각이었는데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는 정말 소중한 기회였고 값진 경험이 됐다고 생각했다. 다음에 또 이런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청소년 참가자 박예소-

사람이 책이라는 사실... 맞다. 사람은 움직이는 책이다. 2월 평화의 시선에서 마티오라는 사람책을 읽었다(=들었다.). 현재 부산에서 대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그는 이집트에서 부모님과 함께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서 한국으로 온 지 4년이 된 청년이다. 이집트 자국 내에서 이슬람교(?) 이외의 다른 신앙을 갖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단다. 전쟁, 환경 등의 난민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종교 난민은 좀 생소했다. 종교적 이유로는 난민 허락이 어려운 모양인지 마티오는 두 번째로 난민 신청을 접수해 놓은 상태라고 한다. 과연 나라면 종교 때문에 난민이 되는 걸 선택할 수 있을까? 종교 때문에 내 나라에서 순교해야 한다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난민으로 간다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울 것만 같았다. 마티오가 한국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기 위해 고생한 것은 실로 엄청났다. 불과 4년 만에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는 학우들에게 자신이 난민이 아니라 이민온 학생처럼 생활한다고 한다. 난민이라고 하면 어쩐지 나쁘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이민 학생처럼 밝게 지낸다고 한다. 몹시 안쓰러웠다. 아직 난민으로 인정이 되지도 않았고 한국어가 서툴어 그냥 집에만 계시는 엄마, 다른 지방의 말농장에서 일하는 아버지, 자신이 감당해야 할 미래가 매우 불확실한 것 같은 마티오의 이야기가 한국에서 해피엔딩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문점숙 마리루치아 수녀-

 

평화의 시선을 통해 실제 난민과 만날 기회가 생기게 됐다. 내가 만나게 된 난민은 태국에서 온 차녹난 이었다. 차논난씨께서는 태국에 관해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내가 알고 있던 태국과는 많이 다른 나라였다. 꼭 여행을 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태국은 쿠데타가 국왕과 군부가 손을 잡고 지속해서 일어나는 나라였다.

그 과정에서 차녹난씨는 끊임없이 태국을 위해 자국민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며 싸워 온 인권운동가였다. 차녹난씨의 이야기를 듣다 보며 우리나라의 민주화운동이 생각났다.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가들이 차녹난씨처럼 싸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태국은 활동가들이 활동을 전혀 할 수가 없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화 운동가들처럼 싸우고 구속되고를 반복하고 셀수 없을 정도로 반복하다가 태국에서는 차녹난씨에게 왕실 모독죄를 구형받았다고 한다. 태국에서 왕실 모독죄가 구형이 되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는데 구속이 되기 전에 죽거나 징역살이 중 죽는다고 한다.

차녹난씨는 이를 피해 한국으로 왔다. 한국에 와서도 태국에서 온 여자라는 것으로 인해 많은 차별의 시선을 받아야 한 했다. 차녹난씨는 유일한 태국 난민으로 9개월 만에 난민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9개월이라는 말을 듣고 너무 오래 걸렸다고 생각했으나 이 기간은 굉장히 짧은 시간으로 차녹난씨가 인권활동가로 유명했기 때문에 빠르게 난민 인정이 되었다고 한다. 아직 많은 난민이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난민을 바라보는 차별과 혐오의 시선이 많다. 차녹난씨를 만나고 나에게 있던 난민을 바라보는 시각이 넓어질 수 있었다. 단순히 내전을 피해 온 사람들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난민의 모습이 다른 많은 이유로 나라를 떠나올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지게 되었다. -구지현 엘리사벳-

 

사람책 소개

 

김민혁

2003생 이란 출신의 김민혁군은 고등학교 재학중이고, 패션모델로 활동하고 있다. 사업하는 아버지를 따라 7살에 한국에 와서 자랐고, 친구들과 어울리다 교회도 다니게 되었다. 2016년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통보를 받았지만 개종을 한 민혁군과 아버지가 이란으로 돌아가면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라 고심하던 중, 학교 선생님과 친구들의 도움으로 국민청원을 하게 되었고, 언론에 이슈화되면서 난민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하지만 민혁군의 아버지는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미성년자인 민혁군의 보호자로 체류하고 있다. 민혁군이 성인이 되면 이란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다.

 

차논난

 

 

태국 출신의 난민 여성 차논난씨는 2000년 이상 왕실체제를 유지하고 황제가 정치에 간섭하고 있는 태국의 정치를 비판하는 대학생으로 주장하고 실천하는 운동가였다. 대학생으로 활동할 때는 태국의 국내 여론이 학생들을 지지하는 국민 여론을 의식해서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도 다시 풀어주는 상황이 반복되었지만 2014년 쿠테타가 일어나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이제 학생의 신분도 아니고 체포되면 군사법정에 서야 하는 상황, 거기다 황실모독죄라는 통고를 받고 2시간 만에 망명을 선택해야 했던 차논난씨는 한국에 와서 광주 민주화 활동가들과 연결되어 난민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현재 MAP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인권운동가로서 자신의 활동을 이어가고 싶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야스민

예멘 출신의 여성인 야스민은 500명의 예멘인이 한국에 오게 된 상황과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예멘 인구의 2%인 후티군이 대통령을 살해하고 수도와 주요 도시를 점령하였고, 젊은이들을 착출 해 전쟁에 참여시키고 있다. 교사였던 야스민씨는 3개월간 월급이 나오지 않아 생활고를 겪었고 이후 일을 할 수도 없게 되었다. 다행히 오빠와 연락이 닿아서 먼 친적이 있는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한국에 오니 제주도밖에는 머무를 수 없었지만 다행히 인도적 체류로 허가를 받아 서울로 올 수 있었다. 한국에 머무르며 직업 소개소 등에서 히잡 착용에 대한 선입견으로 상처를 받았다. 난민이라 행복한 것이 아니라 자신은 예멘으로 돌아가야만 행복해 질수 있다고 생각한다

 

차크마 나니

차크마 나니씨는 방글라데시에서 온 난민이다. 방글라데시는 국민 대다수는 벵골어를 쓰는 뱅골인이 98%이고 차크마 나니씨는 벵골인이 아닌 소수민족 중 하나인 줌머족이다. 1971년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한 방글라데시에서 줌머족은 인종 청소와 인종차별의 표적이 되었다. 차크마 나니씨는 1994년에 인도, 태국을 거쳐 한국으로 오게 되었고, 처음 머무른 도시가 인천이라고 한다. 인천에 와서 가톨릭회관에서 노동상담도 받고 인천에 좋은 기억들이 있다고 한다. 2002년에 난민 신청으로 해서 2004년에 인정되었고 귀화 신청을 해서 2014년에 이씨라는 성을 가지면서 이나니라고 불리게 되었고 현재 노동상담을 하며 생활하고 있다.방글라데시에서는 박해, 종교갈등이 심한데 한국은 종교의 자유가 있고 경제, 문화 등 여러 가지의 이유로 한국을 선택했다고 한다.

 

마티오

이집트에서 온 마티오군은 아버지,어머니와 함께 2016년 한국에 오게 되었다. 이집트에서 종교의 선택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종교를 바꾸는 것은 곧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행을 택한 마티오의 가족은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더 없는 노력을 해야만 했다. 가족모두는 뿔뿔히 흩어져 아버지와 어머니는 일을 하고 마티오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한국의 학교에 다녀야만 했다. 한국말을 전혀 몰랐기에 수업시간에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던 마티오는 한국어능력평가시험을 준비했다. 첫 번째 시험에서 40점을 맞았지만 다섯 번째 도전에서 수능을 치를 수 있는 점수를 받게 되어 부산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마티오는 친구들에게도 난민이라고 말을 하지 못한다. 난민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난민임을 밝히기 어려우 상황이다. 가족은 흩어져 살고 있는 상황이지만 마티오는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 한번의 난민신청이 통과 되지 못했고 이제 두 번째 난민신청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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