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평화위원회는 지난 4월 20일 세월호참사 10주기를 맞아 "세월호참사 10년, 우리는 얼마나 달라졌나?"라는 주제로 성찰 좌담회를 가졌습니다. 이날 좌담회에서 나승구신부님의 발제문을 공유합니다.
세월호참사 10주기 성찰 좌담회
나승구 프란치스코하비에르 신부
10년 전 성주간이었습니다. 내일이면 성삼일이 시작되겠구나 생각하며 아침을 먹고 하루를 준비하는데 평소에 알고 지내던 예수수도회 수녀님으로부터 문자가 왔습니다. 함께 사는 수녀님의 조카가 수학여행을 갔는데 제주 가는 배가 침몰했다고 무사히 구조되기를 기도해달라는 문자였습니다. 화살기도를 올리고 걱정 가득한 채 초조한 마음으로 외출할 준비를 하는데 수녀님으로부터 다시 전원 구조되었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기도해 주어서 고맙다고 문자가 왔습니다. 잘 되었다 싶어 그렇게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어서 들려오는 소식은 참담함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랬다저랬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바뀌는 소식은 현장에 이를 제대로 바라보고 대처하는 세력이 전혀 없음을 말해 주고 있었습니다. 처음 다가온 느낌은 희생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희망을 주었다 다시 빼앗는 일들이 반복되었습니다. 하지만 속보로 전해지는 참사의 생방송에서 점차 안타까움은 사라져 가고 소위 말하는 전문가들의 주장만 난무했습니다. 청해진해운의 소유주 이름만 한참을 떠들던 언론이었습니다. 밑돌 빼서 윗돌에 놓는 것 같은 빈 소리만 허공에 가득했습니다. 부활을 맞이해야 하는데 부활을 이야기할 수 없는 처절함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당장 밀양으로 부활 엠마오를 떠나기로 준비하고 있었는데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임도 컸습니다. 밀양 송전탑 건설 현장에서 움막을 파고 온 몸을 던지는 할매들의 모습과 물속에서 거친 숨을 들이쉬는 희생자들의 모습이 수없이 교차되었습니다. 그렇게 2014년의 부활은 빼앗겨 버렸습니다. 누가 빼앗아갔는지도 모르는 채 그렇게 부활절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어지는 시간들은 계속되는 팽목에서, 안산에서, 그리고 광화문에서 이어진 행진과 성명 발표와 단식과 기도회였습니다. 참사를 기억하고 잊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국민들과 함께 하는 거리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후로도 세월호는 우리 시대의 멈추지 않는 아픔이었고 그래서 숙제였습니다.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대구 지하철역 화재 참사, 아현동 가스폭발, 성수대교 붕괴 참사, 해병대 캠프,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 우리 현대사는 가슴 아픈 참사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세월호 이전에는 이 모든 것들이 그저 일어날 수 있는 사고 정도로 여겼습니다. 슬프고 가슴은 아프지만 묻어두고 또 삶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이 오히려 설득력 있는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참사 가운데에서도 자신을 던져 구조 활동을 했던 의인들의 이야기가 더 많이 회자되곤 하였습니다. 70년대 이후 눈부신 국가발전, 한강의 기적 뒤에 그저 있을 수 있는 부작용 정도로 치부하고 말았습니다. 참사가 일어난 그곳에 간 것은 개인의 불행일 뿐이었습니다. 운 좋게 그곳을 벗어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빛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같은 내용의 참사가 거의 정기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 사회였습니다. 국가 재난 지역으로 선포된다 해도 짦은 애도의 시간이 지나면 역사 뒤편에 꽁꽁 숨겨놓았습니다. 모든 참사는 얼마나 많은 돈으로 위로를 하느냐로 포장되었으며 전 국민적인 성금운동이 뒤따랐습니다. 세월호의 경우도 이내 보상금 이야기가 나왔고 지금도 “충분히 보상을 받은 유가족들이 아직도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고 N차 가해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참사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국가경제의 침체를 걱정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신문방송을 오염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수학여행도, 여행도, 관광도 이제 참사 이전으로 돌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 ‘왜?’라는 질문이 대두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늘 국가는 없었습니다.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고 명백히 국가의 책무를 지정한 헌법 34조6항은 허공에 흘러가는 구름 같은 이야기일 뿐입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논리는 참사재난산재 피해자들의 호소를 떼쟁이의 허황된 요구라고 무시했습니다. 국민총화가 온 국민이 살아날 길이라는 오랜 전체주의가 지배하는 국가체제의 민낯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생명과 안전에 대해서 “세월호 이전과 이후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온 국민의, 아니 전 세계가 참사에 대한 자세를 달리하는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피해자들은 서로를 연결하며 개인적인 아픔을 사회적 참사의 주제로 내어놓았습니다. 시민들은 잊지 않겠다며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온 세상이 세월호참사와 이를 대하는 정부의 자세를 자세히 바라보기 시작했으며 이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진실을 감추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정부의 초라함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진실규명’이라는 구호가 나왔고, 하급관리 몇 명의 처벌로 끝내려고 하는 몰염치에는 ‘책임자처벌’이라는 구호로 진실을 찾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성찰과 외침에도 불구하고 이후로도 참사를 대하는 정치공동체의 모습은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주무관청을 없앴다가 다시 일으킨 몇 가지 해프닝만 있었을 뿐입니다. 이태원 참사에 대한 태도가 어찌 그리 세월호참사와 대비되는지..... 변한 것은 시민들의 각성뿐이었습니다.
한편 세월호참사 직후 서울교구 사회복지회장이었던 정성환 신부는 팽목항에 약 한달 간 계속 머물렀습니다. 사실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저 희생자 가족들의 옆에 머무는 것이 다였습니다. 피해자들의 유해가 수습되는 팽목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교구에 계속 보고하고 교구 신부들에게 세월호의 이야기를 수시로 전해주었습니다. 고통을 바라보는 교회의 역할 중 하나는 현장에 머무는 것입니다. 답은 언제나 현장에 있다고 합니다. 조금이라도 거리를 둔다면 왜곡이 일어납니다. 왜곡된 관찰은 늘 잘못된 판단을 가져오며 엉뚱한 행동을 유발할 뿐입니다. 물론 교회가 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정확한 대처를 할 수는 없습니다. 정성환 신부가 그랬듯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그저 같이 아파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고통의 자리를 벗어난다면 그야말로 남의 일이 되고 맙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이야기입니다만 광주대교구의 연령회는 침몰현장에서 발견되어 팽목항에 올라오는 희생자들의 시신을 깨끗하게 수습하여 유가족들이 가족의 험한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후에 유가족들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그래서 그렇게 깨끗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었다고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고통을 당하는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입니다. 광화문에 기억공간이 생겼을 때 어떤 이는 와서 뜨개질을 하고, 어떤 이는 리본을 나누어주고, 어떤 이는 문화제를 준비하고, 어떤 이는 기도를 하고, 어떤 이는 피켓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그저 옆에 앉아 책을 읽었습니다. 이렇게 고통의 자리에서 함께 있는 것, 그리고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손인성 스테파노, 이분은 팽목성당 지킴이입니다. 이분은 팽목항에 컨테이너 성당인 팽목성당에 매일 3시에 오셔서 세월호 희생자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서, 유가족들의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분이십니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성실함입니다. 팽목항은 10년 전과는 사뭇 달라져 있습니다. 가족들의 거처로 사용되던 임시 주택도 사라졌고, 피해자들의 유해가 올라올 수 있도록 마련된 작은 포구도 사라졌습니다. 그 넓은 곳에 들불처럼 붙어 있던 노란 리본도 거의 빛을 바래다 못해 사라졌습니다. 초라하던 팽목항은 이제 제주까지 가는 고속여객선이 취항한 거점 항구가 되었습니다. 변하지 않은 것은 분향소와 가족식당, 새로 지어진 여객터미널에 비해 초라하게 보이는 강당, 그리고 이제는 녹이 슬어버린 컨테이너 성당입니다. 가끔 신부들이 들르면 미사를 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무려 10년이나 그 자리를 지키는 지킴이의 마음이 한없이 고맙기만 합니다. 교회가 해야 할 역할이 바로 이와 같은 항구한 지킴입니다. 노란리본을 달고 다니다가 얼마 안 되어 사람들의 흰소리를 듣게 됩니다. “아직도 달고 있냐?”는. 조금만 눈을 돌려도 볼 수 있는 노란리본은 이제 찾아보기 힘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고통의 상징인 십자가를 아직도 달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세월호에 관심을 보이신 분이 계십니다. 그해 8월 나흘 동안 한국을 방문한 교종 프란치스코는 그 빠듯한 일정 내내 거의 매일을 세월호 가족들을 만나고 위로하였습니다. 14일 공항에 마중 나온 세월호 가족들을 만났고 다음날 15일에는 일일이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했으며, 16일 한국순교자 124위 시복식에 앞서 34일째 단식 중인 유민 아빠 김영오씨를 만난 일은 참으로 감격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17일에는 승현이 아버지 이호진씨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18일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세월호 추모 행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는 “인간적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는 선언적 대답으로 참사를 대하는 참된 자세에 대해 묵직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이렇듯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에 대해 ‘모든 형제들’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이 회칙을 쓰는 사이에 예기치 못하게도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19(이하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고, 우리의 거짓 안전이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여러 국가들이 이 위기에 다양하게 대처하였지만 공동 협력에는 무력하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우리는 초연결되어 있음에도,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주는 문제들의 해결을 더욱 어렵게 만든 파편화가 증명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하던 역할을 더 잘하는 것만이 관건이라고 생각한다면, 또는 기존의 법이나 체계들을 개선해야만 하는 것이 유일한 메시지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 아무도 혼자서는 삶에 대처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지탱하고 도와줄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앞을 바라보도록 서로 도움을 줍니다. 함께 꿈꾼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
이처럼 교회의 역할은 고통을 겪고 있는 피해자들의 곁에 함께 있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변함없이 옆을 지키다보면 함께 갈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이제 10년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아직까지는 변치 않는 마음으로 함께 아파하고 위로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10년을 기억하고 바꾸어야 할 세상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합니다. 한편으로 10년이라는 숫자의 의미만 너무 커지면 11년째부터는 쪼그라들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것이 행사를 치러내는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아픔이요 고통의 자리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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